lacri [2] · MS 2002 · 쪽지

2010-11-17 16: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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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D-1, 시험을 치르는 모든 오르비 후배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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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이 왔습니다. 여러분의 남은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몇 안 되는 중요한 날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의 다수에게 있어서, 그런 중요한 날들 중 첫 번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말이 어려분에게 많은 부담을 주고, 여러분들을 흥분하게 하고, 긴장하게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긴장도 여러분들이 넘어서야 할 벽이고, 적응해야 할 장애물입니다. 



  수능 전날에는 원래 잠이 오지 않습니다. 나는 세 번의 수능 시험 모두가 그랬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불안해 할 필요도 없고, 따뜻한 우유 마시면서 애써 잠을 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뇌에서는 카페인보다 몇 배 더 강력한 호르몬이 쉬지 않고 뿜어져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긴장은 수능 시험장까지 줄곧 유지되기 때문에, 잠을 거의 못잤다고 해서 성적에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습니다. 나는 첫 번째 수능 시험 때 30분밖에 잠을 자지 못한 채 수능 시험장에 갔고, 그 다음 해에도 2시간밖에 잠을 못 잤습니다. 

  수능 시험일에는 원래 몸이 좋지 않습니다. 두통도 있고 열도 오르고, 몸살 기운도 있습니다. 응급실에 실려갈 정도가 아니면 그 역시 시험 결과에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저와 같이 서울 의대 정시 모집에 입학한 친구 중 하나는 수능 시험장에서 급성 충수돌기염(흔히 맹장염이라고 부르는)으로 극심한 복통을 이겨내면서도 전국 10등 수준의 수능 성적을 받았습니다. 물론 시험이 끝나자 마자 응급실로 직행했지요. 요는, 웬만한 컨디션 난조는 여러분이 본래의 실력을 발휘하는 데 거의 영향을 주지 않으니, 불안해 하지 말고 의연하게 시험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두개의 애매한 선택지 중에서 답을 고칠 때, 고친 답이 정답일 확률은 50%가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답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경우에는 답을 고치지 않는 편이 현명합니다. 원래의 답이 틀린 이유와 새로 고칠 답이 맞는 이유를 동시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때에 한해 답을 수정해야 합니다.

  쉬는 시간마다 총정리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복도나 운동장에서 바람 쐬며 심호흡하고 들어오세요. 긴장과 집중으로 지친 뇌를 최대한 높은 효율로 쉴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대신, 탐구 영역 또는 제2외국어 영역의 마지막 한 문제까지, 이마가 부서질 것 같을 정도로 집중을 한 채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잠시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 잃어버린 한 문제가, 여러분의 인생을 통째로 뒤바꿔놓을 좋은 기회를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그 기회를 다시 잡으려면 최소한1년의 시간을 고통 속에서 더 기다려야 합니다.

  문제를 풀 때는 집중해야 하지만 5문제(수리, 탐구) 또는 10문제 (언어, 외국어)를 풀 때마다 시간을 중간 점검해 가면서 푸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언어의 경우 50문제를 80분 동안 풀어야 하는데, 듣기를 제외하면 45문제를 67분 동안 풀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킹과 최종 정리, 예를 들자면 애매한 문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한 5분을 빼면 45문제를 62분 동안에 풀어야 합니다. 한 문제에 1.38분이 할당됩니다. 즉 1번 듣기 평가가 8:40에 시작해서 8:53에 끝나면 매 10문제(아마도 2개의 지문)를 14분 안에, 즉 9:07, 9:21, 9:35, 9:49에 다 풀어야 합니다. 중간중간 이 시간을 보아가면서 완급 조절을 합니다. 시간이 남는다면 뒤에 있는 문제는 약간 더 꼼꼼하게 볼 수 있는 것이고, 시간이 모자란다면, 정확도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마지막 지문까지 모두 풀기 위해 속도를 올려야 합니다. 수리의 경우 30문제를 100분에 푸니까, 문제당 3분의 시간을 소모한다고 계산하면 간편합니다. 외국어의 경우 듣기, 말하기를 제외한 33문제를 50분에 풀어야 하므로, 문제 당 1.5분의 시간이 주어진 셈입니다.

  원래 최상위권에서는 대부분의 문제를 실수로 틀립니다. 문제를 풀다 보면, 불현듯 이미 끝난 영역에서 실수했던 것이 생각나거나, 주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아차 싶은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학생들도 여러분만큼의 실수는 하기 때문입니다. 실수가 없었다면 운이 좋은 것이지만, 있었다고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습니다.

  수리 영역 문제를 풀다 보면, 언어 영역에서 못 풀었거나 틀린 게 확실한 문제들이 떠오를 것이고, 점심시간이 되면 수리 영역의 찜찜한 문제가 머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집에서 혼자 풀어보는 수능 점수가 훨씬 높음을 경험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시험장에서 문제를 풀 때는 실제보다 항상 훨씬 더 어렵게 느껴진다는 뜻이 됩니다. 시험장에서는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습니다. 왠지 1~2문제만 틀려도 서울대는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실제 나중에 뒤돌아 보면 3~4문제를 틀려도 별 문제가 없을 때가 흔합니다. 여러분이 틀린 문제는 다른 학생들도 틀렸습니다. 

  시험장 같은 교실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여러분보다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둘 이상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실제로 수능 시험장을 경험해 보면, 바보들끼리 답을 맞추어 보면서 틀린 답을 둘이 같이 썼다고 신나서 좋아하는 광경도 볼 수 있지요. 애매하게 느껴져서 찜찜했던 문제는 다른 학생들보다 여러분의 선택이 맞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주변의 소음에 신경쓰지 마세요.



  나는 내일 수능 시험을 치는 당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에게도 ‘수능 대박’이란 것은 없기를 바랍니다. 실력과 학력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변별해야 하는 시험에 운이 개입되는 것은 불공정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불쾌한 일입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이 이곳에 없는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더 열심히, 더 집중하여 공부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별을 보며 집을 나서고, 별을 보며 집에 들어오면서, 책상 위에서 토막잠을 자본 적이 없는 학생에게는 부당한 수능 대박이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쏟아부은 노력 만큼의 대가를 받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여러분의 꿈을 이룰 것입니다.

  웃는 얼굴로, 내일 다시 만납시다. 내일 이맘 때에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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