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이야기 번외편 - 훈련과 숙련도
저는 공부를 하는 것이나 운동선수가 훈련을 하는 것, 혹은 프로게이머들이 게임 연습을 하는 것 모두를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합니다.
이 글을 읽는 수험생 여러분들은 오늘도 수십 문제에 달하는 양의 문제지를 풀었을 것이며, 자신이 오늘 또 틀린 문제를 오답노트에 꼼꼼히 기록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수능을 치기 전까지 계속해서 비슷하고 똑같은 유형의 문제를 반복 숙달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여태 제가 실전 모의고사를 몇 회나 풀었었는지 기억조차 제대로 나질 않습니다.
운동선수들 또한 수험생들과 비슷한 일을 많이 합니다. 그들은 처음 해당 종목을 배울 때부터 끊임없이 기초 자세를 잡는 훈련을 받습니다. 골프선수들은 제대로 된 스윙 자세를 위해서, 아주 기본적으로 골프채를 좌우로 휘두르는 연습을 수백 번씩 합니다. 이런 기본자세를 제대로 잡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입니다. 아주 지루한 일이지만 계속해서 시간에 걸쳐 반복하여 잘못된 습관을 교정해야 합니다.
탁구선수들은 처음 탁구를 입문할 때 기본적으로 채를 잡고 공을 치는 자세를 연습합니다. 골프선수와 마찬가지로 이런 기초에 해당하는 훈련을 오랜 기간 수도 없이 반복하여 탄탄한 기본기를 다집니다.
저는 공부나 게임, 운동을 모두 끊임없는 반복 훈련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몇 해에 걸쳐 기본기를 잡고 경험을 쌓는 훈련을 한 사람과, 이제 막 해당 종목을 시작하는 초보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결국 숙련도의 차이입니다. 현역들이 첫 수능에서 멘탈이 박살나고 나서 재수를 한다 하더라도, 학생의 지적 수준이 그렇게 폭발적으로 향상되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재수생들을 현역보다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한번 겪어본 경험이 있고 더 오랜 시간을 쏟아부었으니, 숙련도에서 현역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숙련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전쟁사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화 <패트리어트 : 늪 속의 여우>에서는 머스킷으로 전열보병들이 서로 라인배틀을 하는 시대를 다루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미국 본토에서 미 대륙군과 영국군이 싸우는 시점입니다. 이때 당시의 미군은 지금 우리가 아는 세계 최강의 미군이 아닌, 군사훈련이나 경험이 부족한 민병대를 급조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때에도 총기를 사용하는 시기였지만, 당시의 머스킷은 대단히 많은 제약조건이 있었습니다. 명중률은 시원치 않았고, 재장전 또한 엄청나게 길게 걸렸기 때문에 현대의 총격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투가 벌어집니다.
(영화 <패트리어트>에서 영국군이 전열을 갖추고 사격하는 모습. 당시에는 머스킷의 한계 때문에 이렇게 군인이 집단적으로 밀집대형을 갖추고 사격을 하였다. 나중에 총기 기술의 발전으로 이러한 모습은 사라지게 된다.
https://www.uludagsozluk.com/k/cephe-sava%C5%9Flar%C4%B1-olmayacak-diyen-tip/)
당시 머스킷 사격수들은 ‘전열보병’이라고 하여 마치 고대에서 긴 창으로 무장한 군인(장창병)들이 모여 고슴도치마냥 모여 있는 것과 비슷한 양상으로 싸웁니다. 이때 머스킷은 여러 가지 치명적인 단점을 가졌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군인들이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모여서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즉, 명중률이 낮지만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사격을 하여 탄막(수많은 점 같은 총알들이 모여 막을 형성하는 것)을 형성하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혔습니다. 재장전이 대단히 길었기 때문에, 옆에서 다른 병사가 백업을 해주는 진형 또한 발달했습니다.
영국군의 전열보병 ‘레드코트’는 세계 최강의 숙련도와 훈련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랜 시간 사격훈련과 진형훈련을 통해 조직적으로 전투하는 습관이 몸에 베여 있었습니다. 당시의 전열보병끼리의 싸움은 쉽게 말해서 ‘누가 덜 쫄고 좀 더 집단적으로 잘 뭉쳐서 버티느냐’의 싸움이었습니다. 국가적으로 투자하여 충분한 군사 훈련으로 무장한 영국군의 레드코트는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줍니다.
당시 화약과 무기는 고가였기 때문에 실전 훈련을 지원할 수 있는 나라가 별로 없었지만, 영국군은 재정을 들이 부어서 병사들에게 실탄사격훈련을 자주 실시하였습니다.
반대로 이런 세계 최강의 보병을 상대해야했던 미 대륙군은 어떤 수준이었을까요? 이때는 독립전쟁 시기였던 만큼 아직 미국이라는 뚜렷하고 체계적인 국가가 형성되기 전이었습니다. 당연히 국가와 국민이 투자하여 군대를 조직적이고 오랜 시간을 거쳐 훈련을 시킬 여력이나 짬이 없었습니다.
세계를 누비며 수많은 식민지를 개척한 경험이 있는 영국군과, 급조된 민병대 수준으로 군사 훈련도 제대로 시키지 못한 미 대륙군의 싸움은 정말 일방적으로 흘러갑니다. 숙련도가 부족한 미군은 한번 전투가 벌어지면 끈기있게 진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와해되었으며, 이 틈을 영국군 기병과 보병이 파고들어 박살내버립니다.
아무리 개개인의 사격솜씨가 뛰어난 사람을 군대로 모집했다 하더라도(당시 미국은 인디언이나 맹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개척하기 위해 농가에서도 총을 많이 보유하였습니다) 조직적인 생활이나 진형을 유지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생초짜입니다. 반대로 개개인의 사격 실력이 좀 부족하더라도 동료와 발을 맞추어 진형을 유지하고 조직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훈련을 받은 군인들은 결코 약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전투 시에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예외상황(옆에서 지휘를 해주던 지휘관이 전사한다던지, 상대 기병이 옆에서 기습을 한다던지)을 대비해 군인은 평소에도 계속해서 그런 상황에 맞추어 훈련을 합니다. 그렇게 반복 숙달해놓은 역량은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몸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이런 튼튼한 기반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민병대나 농민군은 쉽게 와해되고 조직이 흔들리지만, 정규병대는 끈질기게 진형을 유지합니다.
저는 수험생들의 공부 또한 군인들이 받는 훈련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시험장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상황에 대비하여 그에 맞춘 예상문제나 기출문제를 반복하여 푸는 훈련을 합니다. 많은 고3 학생들은 이제 기출문제 정도는 눈 감고도 풀 수 있을 정도로 몸에 완전히 익혀져 있을 것입니다. 수능 시험시간에 맞추어 제한된 시간동안 빠르게 풀고 맞추는 훈련은 초보와 고수를 가르는 기준입니다.
제 친구들 중에선 영재고나 과고를 나온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 친구들은 분명 저보다 IQ라던지 아니면 수학과 과학에 대한 흥미와 재능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한번도 수능 공부라는 훈련을 해본 경험이 없습니다. 저는 반대로 고등학교 3년 + n수 동안 계속해서 수능을 훈련해왔습니다. 재능은 분명 제 친구들이 뛰어날지 몰라도, 시험 성적은 제가 더 높을 것입니다.
프로선수들은 현란하고 멋진 기교와 테크닉으로 대중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그 선수들의 화려한 모습 뒤에는 손이나 발이 뭉툭해질 정도로, 고된 반복과 훈련으로 쌓아 올려둔 기본기가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처음 운동을 배우는 사람 또한 프로들의 기교를 목적으로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자세를 잡기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합니다.
효율적인 훈련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당 훈련의 의의와 목적을 인지해야 합니다. 내가 오늘 이런 연습을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라는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어떤 학생이 하루종일 다항 함수를 미분하는 연습을 했다면, 그 날이 끝나고 나서 ‘아 지겨웠어’라는 말이 아니라, ‘난 나중에 다항함수를 만났을 때 개형과 양상을 알아내기 위한 훈련으로 하루를 투자했어’라는 보람찬 말이 나와야 합니다.
훈련은 이렇게 하나하나 쌓아올려가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 유형만 완벽하게 정복했다면, 한달 후에는 30가지의 유형을 정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쌓인 경험이 바탕이 되어 성적이 올라갑니다. 프로선수들의 기교(마치 전교 1등의 성적)에 현혹되서 처음부터 그런 고난이도 테크닉을 발휘할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강력한 재능을 가진 사람도 처음부터 그런 것들을 따라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반복적인 기본 훈련이 밑바탕이 되어야 가능한 목표입니다.
전쟁사 시리즈(약 11편 예정)
https://orbi.kr/00020060720 - 1편 압박과 효율
https://orbi.kr/00020306143 - 2편 유추와 추론
알고리즘 학습법(4편예정)
https://orbi.kr/00019632421 - 1편 점검하기
학습이란 무엇인가(11편 예정)
https://orbi.kr/00019535671 - 1편
https://orbi.kr/00019535752 - 2편
https://orbi.kr/00019535790 -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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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학생이 하루종일 다항 함수를 미분하는 연습을 했다면, 그 날이 끝나고 나서 ‘아 지겨웠어’라는 말이 아니라, ‘난 나중에 다항함수를 만났을 때 개형과 양상을 알아내기 위한 훈련으로 하루를 투자했어’라는 보람찬 말이 나와야 합니다." 이 말 정말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혹시 다음편 업로드 재촉 안 하면 다음편 안 올라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