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7일,
제 생애 가장 간절하고 치열했던 재수 생활이 끝났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저는 머리 믿고 공부는 안하는 그런 학생이었어요.
형편없는 내신 성적을 받으면서도
성실히 공부해서 저보다 좋은 내신 성적을 받지만
저보다 모의고사 점수는 낮은 아이들을 보면서 알게 모르게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던....... 재수없는 아이였죠.
주구장창 놀아댔고 학교 특별실 애들이
넌 왜 맨날 자리에 사람은 없고 가방만 있냐 고 묻던,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는걸 은근히 즐기기도 했던,
그런 아이였어요.
맨날 근거없는 자신감만 넘쳐가지고는
고3 때 힘들어하는 친구들 보면서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말을 아주 쉽게 내뱉는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심지어 스스로는 나름대로 열심히한다고 건방진 착각까지 하고 살던......
뭐 그런 학생이었어요.
그리고 2012년 11월, 첫 수능을 치고 형편없는 성적표를 손에 쥐었습니다.
그러고도 반성할 줄 모르고 '난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성적을 받았지' 의아해했어요.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사람이 노력하는 모습이 정말로 아름답다는 걸 느끼고
제가 그때까지 그렇게 아름답게 노력하며 산 적이 없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어요.
'의대도 아니고 서울댄데, 내 성적이면 가겠지 뭐'
같은 건방짐에 쩔어있던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도 깨달았어요.
그리고 저의 그런 태도 때문에 제가 저의 목표에 그렇게 커다란 간절함이 없었다는 것도.
그리고 재수를 결심했습니다.
제 목표는 이거였어요.
'간절하고 치열하고 겸손하게 살자.'
'재수하는 한해동안 내가 얼만큼 간절하고 치열하고 겸손할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해보자.'
조금 더 가시적인 목표는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14학번 정시 수석'이었지요.
친구랑 노는 걸 좋아하고 그거에 시간을 제일 많이 빼앗기는 저는,
치열하게 살기 위해서,
핸드폰을 정지하고 재수하는 동안 바깥 친구와 연락도 하지 않았고
학원 안에서도 친한 친구 한두명 외에 다른 사람과는 거의 말도 썪지 않았어요.
사람 좋아하는 제가 다른 사람들 얼굴, 이름을 외우기 시작하면 괜히 친해지고 싶어질까봐
안경을 벗고 다니고(사람 얼굴을 제대로 못 보니까), 복도에 다닐 때 눈을 깔고 다녔어요.
가끔 같이 재수하는 친구들을 통해서 바깥 친구들이 밥 사주겠다고 연락이 와도
주말 자습시간이 줄어드는게 무서워서 수능 끝나고 보자고 미뤘습니다.
수능 한달 전 쯤, 열이 38도를 넘어가도 조퇴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공부했고
학원을 마치고 실려가듯 응급실로 가서 닝겔을 맞았어요.
그렇게 공부하다보니 간절해지더군요.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14학번이 저에겐 정말로 간절했습니다.
진짜 올해는 서울대학교 간다, 매일 생각했고
자기 전에, 공부하기 싫어질 때, 마음이 흐트러질 때
수없이 마음 속으로 되뇌고 공부하는 노트에다
'나는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14학번 정시 수석생이다'고
적으면서 다시 힘을 냈어요.
건방져져서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아무리 모의고사를 잘 친 날이라도 학원에 끝까지 남아서 공부했고,
맞은 문제라도 헷갈렸다 싶으면 다시 꼼꼼히 풀었고,
아무리 같은 반 애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자습하려고 나가는 수업이라도
저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어요.
못 가르치셔봐야 나보다는 아시는게 많은 분이야, 하면서.
수능이 다가오니 현역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떨리더군요.
그럴 때마다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저에게 되뇌었던 말이 있었어요.
'너만큼 열심히 했는데 수능을 못 치는게 이상한거야.'라고.
이렇게 적으면 참 합격 수기 적는 거 같은데
전 그렇게 열심히 하고 또다시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수능 끝나고 가채점을 하는데
세상이 무너지는 거 같더군요.
앞이 깜깜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고
정말로 말 그대로 '살고 싶지 않았어요'.
아니, 사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1년 내내 머릿속으로 서울대 입학 후의 제 삶을 그려왔던 저는
서울대에 갈 수 없을 점수를 받으니 앞길이 아무것도 그려지지를 않더라구요.
눈뜨면 울고 밥먹다가 울고 책정리하다가 울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흐르고
그렇게 많이, 길게 울어본 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나 올해 정말 열심히 했구나.
열심히 안 했던 작년은 그 점수 받고 황당했을 뿐이지 이렇게 슬프진 않았는데
올해 난 이렇게까지 이 결과가 원망스럽고 좌절스럽고 슬플만큼
열심히했구나.
간절했구나.
그럼 나, 결국 내가 목표한건 이룬거 아닐까.
간절하고 치열하게 살겠다는 내 목표.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금씩 추슬렀습니다.
서울대는 택도 없는 점수였지만,
제가 1년 간 노력한 단 하나의 목표에 지원조차 안하고 싶지는 않아서
결국 주변에서 말리는데도
나군에 서울대를 냈네요.
예상하고 있던 결과지만
서울대 정시 1차 불합격 발표가 오늘 났습니다.
고등학교 내내 건방지고 건성선성 살면서 생긴 저의 부족함이
재수 1년간의 치열함과 간절함, 겸손함으로 채워지기는 역부족이었나봐요.
하지만 저에게 분명히 의미있었던 재수 1년이었습니다.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지요.
언젠가 돌아보면 분명 저의 지난 1년이 저의 인생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질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 문득문득 끝없이 우울해지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원망이 들기도 하지만.........
서울대 외에 제가 낸 다른 대학에 합격을 하던,
다 떨어져서 삼수를 하게 되던,
결과를 받아들이렵니다.
대신 그 결과를 받아들임으로써 펼쳐질 앞으로의 저의 인생을,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치열하고 간절하게 살았던 이 1년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거에요.
오르비에 감동적인 합격 수기를 올리고 싶었던 바람은 실현 할 수 없겠지만
재수 생활 동안 오르비에서 참 좋은 자료도 많이 얻고해서 감사하다는 말은 전하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착잡한 마음 정리하려고 올린 글에 이렇게 성의있게 댓글 달아주시니 힘이 되네요. 홍홍홍힝님은 수능 성적이 잘 나오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우리 둘 다 어떤 길을 가게 되던 열심히 살아요!
댓글 달았다가 좀 오글거려서 삭제해 버렸는데;; ㅎㅎ 아무튼 좋은 결과 꼭 얻으실 겁니다^^
힘내세요 시험 한번 못봤다고 인생 다 끝난거 아니에요....이런 말하긴 뭣한 나이지만... 인생은 살아봐야 알고 게임은 끝나봐야 아는거에요
아무 힘도 안 된다는 건 뻔히 알지만..
힘내세요. 이 말 밖엔...
서울대보다 훨씬 값진 것 얻으신 거에요.
사람들이 재수 한번 해볼만 하다고 하는거 대학 레벨 상승 때문에 그러는게 아니에요.
진짜 모든걸 던지고 한번 제대로, 그리고 꾸준히 해본 경험을 얻기가 정말 어렵기 때문에 그러는 거죠.
한평생 뭔가를 정말 열심히 해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객관적인 피드백도 치열하게하시고, 전략수정 + 노력 하셔서 다시한번 힘내시길 바랄게요
멋있습니다. 대단하셔요....치열했던 일년이 님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제 생각엔 이미 합격 수기보다도 더 감동적인 수기가 된 것 같네요. 올 한해 정말 힘들게 달려오신만큼, 어떤 길을 가시더라도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멋지세요.
진솔한글
감동입니다
ㅠㅠ 저도 똑같이 열심히했는데 아쉽더라구요 저랑비슷하신거같아요 저도 똑같이 울다가 슬슬 추스리는중이거든요
운칠기삼이라는말이 진짜인것같습니다ㅠㅠ
와 진짜 멋있다
흠흠...서울대...저도 한떄 꿈꿧었죠 그 마음 이해합니다...
제가 삼반수해서 아는데요. 이렇게 열심히하신분이 한번 더하게 되죠? 그럼 반드시 그게 성적으로 나타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힘내세요!
멋지십니다 정말
가채점 후 현역때는 황당했지만 재수 때는 슬펐다는 말, 격히 공감합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현역때는 눈물은 커녕 별 감정이 들지않았었는데 재수 때는 주체할 수 없게 눈물이 나더랍니다.. 정말 그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저도 서울대를 바라보고 공부했지만 수시로는 이미 탈락, 정시로는 부족한 점수였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시로 다른 대학을 붙어서 지금은 자신을 추스리는 중입니다. 저도 아직은 현재 입학할 대학에 진학해서 길을 찾을지, 아니면 한번더 도전을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비록 원하던 결과를 쟁취하지는 못했으나 우리가 터뜨린 그 눈물은 분명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님도 저도, 이제는 앞으로의 미래를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맞이할 수 있길 바랍니다. 수고하셨어요 :)
훌륭한 학생이군요. 인생은 깁니다. 지금 서울대 떨어졌다고 낙심하지마세요.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그리고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모습 아름답네요. 앞으로도 그런 마음자세로 살아간다면 분명 좋은 결과 있을 거에요. 더욱 정진하길 바라며, 님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길 빕니다.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화이팅 보냅니다~
정말 멋져요. 반성하고 노력하고 받아들이고..자극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뜨끔하네요 저도 물천을 꿈꾸고 잇어요 더 열심히 살아야 겠네요
저두 고3때 정말 치열하게 공부했었는데 목표했던 설대에 택도 없는 점수를 받았어요.. 이미 잘하는 애들이 많아서 거길 비집고 들어가려면 1년 열심히 했다고 되지는 않더라구요 지금 다니는 곳도 만족하지만 내년에 면접도 없어지고 정시비율도 늘어난대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쳐보려구요 님도 힘내세요
처음부터 재수 공부시절 얘기 때까진 제가 쓴 줄 ㅋㅋㅋ 저랑 성격이나 케이스가 참 닮았네요... 저는 수능 만점을 바랬지만 결과가 기대에 못미쳐도 행복합니다. 어느 대학도 아닌 본인 스스로에게 합격증을 받으신 거잖아요. 힘내시구 다시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댓글을 안 달 수가 없네요.... 1년 후의 합격후기 기다리겠습니다
남자시네..
1년 이상의 배움을 얻으신거죠. 이건 다른 사람이 5년, 10년을 고생하고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 소중한 배움이라 위안 삼으시고 힘내세요. 화이팅!
20살에 이미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를 깨달았군요. 부럽습니다. 저는 35살에 그걸 깨달았어요.
저도 올해 서울대 보고 재수한 이과생이에요.... 수능 끝나고서 제 상황이랑 너무 비슷하셔서
공감이 많이 됩니다ㅠㅠ 정시 지원한 건 일단 잘되시길 바라고요!! 올해 수고하셨어요!!
진솔한 후기네요.. 같은 재수생으로서 격하게 공감하고 갑니다^^ 제가 보기엔 학벌보다 값진것 얻으신것 같네요ㅎㅎ
재수 땐 잘 보든 못 보든 가채점보고 울컥하는 듯 합니다......
엄마 입장에서 학생이 정말 자랑스럽고 대견하네요.
아버님께서도 마음 속으로는 아들이 참으로 대견하고 든든해서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으실거에요.
우리 세대 남자들이 워낙 표현이 서툴러서...
정시에서 꼭 좋은 성과 있길 바랄께요^^
낯 모르는 아들이지만 기도 할께요
(웬지 남학생 일 것같네요^_^)
그렇게 값진 재수 경험이 같이 재수한 입장으로서 많이 부럽습니다.
저보다 훨씬 생각도 깊으신 것 같고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진솔한 글 잘 읽고 갑니다.
저는 님보다 한창 낮은 학교인 한국외대 용인캠퍼스와 경희대 국제캠 목표로 달려왔습니다 수능을 망해서 이미 지잡대에서 2년을 마치고 편입을 도전하다 한차례 낙방 지금 경희대 시험을 치르고 왔는데요 차라리 재수나 삼수했으면 뭐 두학교에 원하는 과는 아니더라도 조려대 가서 안암에 원하는 과 복전이나 외룡공은 가능하지 않았나 싶더라고요 ㅜ 제 생각 나서 댓글다네요 이렇게 힘든 것이 나중에 오히려 취업은 단칼에 되실 거니 ㅡ고생없이 한번에 붙으신 분보다 더 잘되실거에요 저도 그렇게 믿어요 님보다 몇년 더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멋집니다!! 비록 떨어졌지만 앞으로일들은 다 잘되실거예요!
글 보면서 왠지 울컥했어요. 저도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