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삼환 [824224] · MS 2018 (수정됨) · 쪽지

2021-12-28 21: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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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사상]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 바로 그 문제

게시글 주소: https://susiapply.orbi.kr/00042352224

안녕하세요, 생활과 윤리 컨텐츠 만들고 있는 유삼환입니다.

저는 생활과 윤리를 잘 하지만, 윤리와 사상도 잘합니다.

오늘은 2022학년도 윤리와 사상 대학수학능력시험 9번 문항과 관련한 칼럼을 준비했습니다.





시험장에서 9번 문항을 보고, 저는 매우 반가웠습니다. 저는 수능 시험 당일 직접 수능장에 가서 수능 시험에 응시하고, 오르비에 누구보다 먼저 생활과 윤리 및 윤리와 사상 답안의 가답안을 올렸습니다([생윤 윤사 가답안 by.유삼환] https://orbi.kr/00040630401 ). 제가 평소 과외 학생들에게 강조하던 기출문제에서의 개념이 변별 포인트로 설정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ㄷ 선지죠.


ㄱ 선지를 판단하지 못하신 분은 거의 없을 테니, 이 글에서 ㄱ 선지에 대한 설명은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ㄷ 선지가 핵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ㄴ 선지는 빈출 개념이었고, ㄹ 선지는 낯설었지만, 제시문에 정오 판단의 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ㄴ, ㄹ 선지에 대해서 짧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ㄴ 선지부터 볼까요?


행복은 영혼의 탁월한 품성 상태라고 정의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을 ‘영혼의 탁월성’으로, 행복을 ‘덕에 따르는(덕과 일치하는) 영혼(정신)의 활동’으로 정의한다는 기본 개념이 응용된 선지였습니다. ‘영혼의 탁월한 품성 상태는 행복이 아니라 덕인데?’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면 누구나 쉽게 풀 수 있었을 만한 선지입니다. 이는 이미 기존의 기출문제들에서 여러 번 확인되는 개념입니다. 다음의 목록을 확인해 보시죠.


1.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의 행위들이 추구하는 목적들은 점점 상위의 목적으로 올라가다 보면 궁극적인 목적에 이른다. 이 목적은 최고선이다. 그렇다면 최고선음 무엇일까? 그것은 행복이다. 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2022학년도 6월 모의평가 5번 문항 갑 제시문]


2. “아리스토텔레스: 덕에 따르는 정신의 활동을 행복이라고 한다. 행복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것이며, 인간 본성에 따라 나오는 선을 추구한다.”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17번 문항 을 제시문]


3. “아리스토텔레스: 존재하는 것은 모두 각자의 좋음을 추구한다. 인간에게 있어 좋음은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고, 여러 탁월성 중에서 최상의 탁월성을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 행복이다.

[2021학년도 6월 모의평가 7번 문항 병 제시문]


4.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말이나 소와 다르게 정신 안에 이성의 기능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고유한 존재이다. 이성적 동물인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의 본질은 덕과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에 있다.

[2017학년도 9월 모의평가 3번 문항 갑 제시문]


덕의 정의가 ‘영혼의 탁월성’이라는 개념은 기출문제에서 확인하기가 비교적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기출 분석이란, 이미 위에서 언급한 행복에 대한 정의를 읽고서 ‘그렇다면 덕의 정의란 무엇일까?’까지 생각해 보고 학습하는 것입니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 정말 바람직한 기출 분석이란 어떤 것인지 짧게 적도록 하겠습니다. 기출 분석은 이 과목에서 가장 ‘사짜’들이 많은 학습 단계이기 때문에, 바른 기출 분석 방법에 대해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다들 무슨 그럴듯한 경력으로 자신의 기출 분석 수업을 들으면 기출 분석이 완벽히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별 내용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기출 분석 강의만 들어서는 기출 분석의 학습 효과를 전혀 낼 수 없을뿐더러, 더 나아가 진짜 확실한 기출 분석은 강의를 듣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기출문제에서 확인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덕의 정의가 ‘영혼의 탁월성’임은 EBS 수능특강 교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아리스토텔레스와 탁월성, 그리고 행복


⑶ 덕론

① 덕: 인간의 고유한 기능인 이성이 탁월하게 발휘되는 상태

[2022학년도 EBS 수능특강 83p]



이러한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을 너무 간단하게 요약해 버린 것이지만(공부를 하실 때는 이러한 설명만 읽고 ‘아하 그런가 보다’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적어도 ㄴ 선지가 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틀린 것인지를 설명하는 근거로 기능하기에는 충분합니다.


다음은 ㄹ 선지입니다.


사물의 좋음과 목적을 알려면 그 사물의 고유한 기능을 알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앞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사물과 인간의 ‘기능’에 관련한 개념도 챙겨 두어야겠네요. 이전 기출문제에서는 명확히 이 부분을 짚은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아래 제시문에서 같은 맥락에 있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 제시문이 직접적으로 이 ㄹ 선지를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1.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말이나 소와 다르게 정신 안에 이성의 기능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고유한 존재이다. 이성적 동물인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의 본질은 덕과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에 있다.”

[2017학년도 9월 모의평가 3번 문항 갑 제시문]


하지만 본 문항 제시문에 선지에 대한 정오 판단의 근거가 확실히 나와 있습니다.


“피리 연주자 같은 기술자의 좋음은 그가 행하는 기능에 있다. 손, 발, 눈 같은 자연적 기관들의 좋음도, 동식물 같은 자연적 존재들의 좋음도 각각의 기능에 있다. 한 사물이 자신의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해 주는 탁월성을 갖추는 것, 그리고 실제로 잘 수행하는 것이 그 사물의 목적이다.”


네, 그냥 제시문 독해로 풀리는 선지였네요. 여러분, 윤리와 사상 문제를 풀 때도 잘 모르겠으면 혹시 제시문에 근거가 있나 꼼꼼히 살피는 습관을 기르셔야 합니다.


그럼 이제 대망의 ㄷ 선지를 살펴볼까요?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수능 시험 직후 ‘아니 이걸 대체 어떻게 알아?’ 하는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엉터리로 기출 분석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 선지에 대한 정오 판단의 근거가 이미 이전 기출문제 제시문들에서 여러 차례 확인되는 점을 보여드리겠습니다.


ㄷ. 좋음은 항상 그 자체를 위해 선택될 뿐 다른 것을 위해 선택되지 않는다.


1.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의 행위들이 추구하는 목적들은 점점 상위의 목적으로 올라가다 보면 궁극적인 목적에 이른다. 이 목적은 최고선이다. 그렇다면 최고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행복이다. 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2022학년도 6월 모의평가 5번 문항 갑 제시문]


2. “아리스토텔레스: 덕에 따르는 정신의 활동을 행복이라고 한다. 행복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것이며, 인간 본성에 따라 나오는 선을 추구한다.”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17번 문항 을 제시문]


3. “아리스토텔레스: 최고선(最高善)은 다른 모든 좋음을 포함하는 완전한 선이다. (O)”

[2018학년도 9월 모의평가 2번 문항 ③]


4.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말이나 소와 다르게 정신 안에 이성의 기능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고유한 존재이다. 이성적 동물인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의 본질은 덕과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에 있다.”

[2017학년도 9월 모의평가 3번 문항 갑 제시문]


위 제시문들을 읽어도 이것들이 ㄷ 선지와 대체 무슨 관련인지 모르시겠다고요? 네, 기출 분석을 잘못 하셨습니다.


기출 분석은 ‘아, 기출문제의 제시문에 이런 표현이 있구나’ 하는 걸 그냥 경험해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강사들이 아마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17번 문항의 을 제시문을 읽어 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 행복이 완전하고 자족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이거 기억해 놓아.”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알아두면 뭐 합니까, 학생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데…….


기출 분석을 하실 때는 제시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대체 행복이 자족적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 평가원은 기출문제를 달달달 풀고 외운 사람이 아니라, 기출문제를 풀면서 이러한 고민까지 품어본 학생만이 만점을 쟁취할 수 있는 시험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과외 학생들을 가르칠 때 누누이 강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족적인 최고선 개념이 시험에 킬러 선지로 나와서 너무 반가웠고, 뿌듯했습니다. 제가 기출문제를 풀면서 저런 부분들까지 눈에 들어왔던 이유는, 제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대해 좀더 깊이 있는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는 철학과 전공생도, 윤리교육과 전공생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래서 여러분도 할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정도의 통찰력은 그냥 서양 윤리학사 개론서 정도만 읽어도 얻어집니다. 문제는, 수험생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강사나 교사들마저도 이조차도 공부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동시에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는 기회이기도 하죠.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기출 분석을 올바르게 한 수험생은, 아래에 제가 설명하는 내용들을 미리 고민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어느 강사도 수능 전 기출 분석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심도 있게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제대로 된 기출 분석 학습은 스스로 할 때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좋음(善)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이 좋음 중 최고의 좋음은 무엇인가요? 행복입니다. 수험생들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 그들이 공부하고 있는 행위는, ‘좋은 대학 진학’이라는 좋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험생들은 왜 ‘좋은 대학 진학’을 추구하고 있는 걸까요? 누군가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누군가는 더 질 높은 교육을 받고 싶어서일 수도 있죠. 구체적인 이유는 제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좋은 대학 진학’이라는 좋음 위에 ‘상위의 좋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최종의 목적으로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대학에 진학함으로써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싶어하는 수험생은 왜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는 것일까요? 모르긴 몰라도, ‘좋은 직장 취직’이라는 좋음 위에도 ‘상위의 좋음’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계속 올라가다 보면, 더 이상 상위의 좋음을 찾을 수 없는 최상의 좋음, 즉 최고선, 다시 말해 행복이 있다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입니다.


그럼 ㄷ 선지가 옳게 되려면 이렇게 고쳐야겠죠. “ㄷ. 좋음최고선은 항상 그 자체를 위해 선택될 뿐 다른 것을 위해 선택되지 않는다.” 어떤 좋음은, 대부분의 좋음들은 다른 것을 위해 선택됩니다. ‘좋은 대학 진학’이라는 좋음이 ‘좋은 직장 취직’이라는 다른 좋음을 위해 선택되듯이요.


그래서 행복을 궁극적인 선이라고 부르고, 자족적인 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족적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스스로 만족이 되어서 다른 좋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 진학’이라는 좋음은 ‘좋은 직장 취직’이라는 좋음을 필요로 하지만, ‘행복’에는 다른 좋음이 더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학습이 누구의 강의만 수동적으로 따라간다고 가능해질까요? 천만에요.


아래의 글을 읽어 보시면 더 풍성한 이해가 더해지실 겁니다. 아래 글에서는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17번 문항 을 제시문에서 ‘자족적’이라고 표현한 것을 ‘자기 충족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 충족적’이라는 표현도 충분히 시험에 출제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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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구적 목적과 본래적 목적의 구별에 기초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흥미 있는 질문을 제기하는데 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오직 그 자체만을 위하여 추구하고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추구하지는 않는 어떤 목적, 더 나아가 우리가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다른 모든 목적들을 추구하게 되는 그러한 목적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달리 표현하면 과연 어떤 “궁극 목적”이 존재하는가라는 것이 된다. 그것을 넘어서서는 우리가 추구할 것이 더 이상 없는 어떤 목표, 즉 우리가 욕구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는 그러한 목표가 존재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궁극 목적이 존재하여야만 한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논증을 제시한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 상상해 보라.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며 그 결과 우리의 욕구는 공허하고 허무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일 어떤 궁극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다른 모든 욕구들은 공허하고 허무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논증은 보다 상세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우선 그는 만일 궁극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욕구할 때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그렇게 할 것이고 이는 다시 다른 어떤 것을 위한 것이 될 것이고 이러한 과정이 끝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렇게 우리가 욕구하는 목적이 다른 어떤 목적에 의존하는 과정이 끝없이 계속되면 이는 곧 철학자들이 무한 소급이라고 부른 것에 이르게 된다.


… (중략) …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욕구 또는 목적과 관련해서 그러한 무한 소급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며 이는 곧 우리가 그 자체로서 욕구하며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욕구하지 않는 어떤 유일한 것이 존재하며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욕구하는 것은 바로 이 유일한 것을 위해서라는 점을 함축한다고 생각한다. 이 목적은 욕구의 연쇄의 제일 끝에 놓이는 것이며 욕구의 소급을 끝내는 역할을 한다(아리스토텔레스 학자들은 과연 그의 논증이 유일한 궁극 목적이 존재함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를 놓고 계속 논증을 벌여왔다. 예를 들면 하나가 아닌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궁극 목적이 존재하며 이들 각각이 모두 욕구의 소급을 끝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이 유일한 궁극 목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상의 선” 또는 “행위를 통해서 추구되는 모든 선들 중 최고의 것”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결국 그 궁극 목적이 최고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중략) …


그러나 그는 뒤이어 바로 과연 행복이 자신이 생각한 최고선의 기준에 들어맞는지를 검토한다(여기서의 기준은 유일한 궁극 목적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 중 첫 번째의 것은 최고선은 우리 인간이 오직 그것을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그러한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최고선은 무조건적으로 완전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최고선은 오직 그 자체로서만 가치를 지니며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수단이어서는 안 된ㄷ는 점이다. 세 번째의 조건은 최고선이 자기 충족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우리는 어떤 것이 오직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바람직하게 만들며 더 이상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을 경우 그것을 자기충족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기 충족적인 목적이란 거기에 다른 어떤 것이 더해지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삶을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만드는 목적이다. 자기 충족성이라는 기준은 왜 오직 하나의 궁극 목적만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만일 둘 이상의(또는 더 이상의) 궁극 목적이 존재한다면 삶을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각각의 궁극 목적에 따른 어떤 것이, 즉 다른 궁극 목적이 더 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궁극 목적들은 자기 충족적일 수가 없고 따라서 오직 하나의 궁극 목적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오직 하나의 궁극 목적만이 자기 충족적일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위의 세 가지 조건 모두를 만족시킨다고 주장한다. 행복은 우리 모두가 목표로 삼는 목적이며 또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행복을 의욕하지 않는다. 또한 행복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다른 어떤 것을 더할 필요도 없다.


[로버트 L. 애링턴 『서양 윤리학사』 115~118p]



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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