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친일 반박 글 쓰신 분?
선동과 날조엔 팩트로 답해야죠
"독립 운동? 말짱 엉터리…나라 망신시킨 자들" 박정희, 독립 운동을 모욕하다
군국주의 일본 교육칙어를 술안주 삼아 줄줄 외운 박정희와 선우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0319
08/30 10:50 IMIN: 672327 IP: 49.♡.162.11 MS: 2016
ㅋㅋㅋ 혈서가 박정희가 쓴게아닌데 저기 들어가자마자 박정희가썼다고 나오네요 박정희가 혈서썼다는 증거부터 가져오시죠?
08/30 10:53 IMIN: 678564 IP: 110.♡.14.52 MS: 2016
http://www.viewsnnews.com/article?q=131775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굴한 기사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로 1차 탈락하자, 1939년 재차 지원 서류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와 함께 채용을 간곡히 호소하는 편지를 제출하며 재응모했다.
박 전 대통령은 편지에서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라며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지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라며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이라고 덧붙였다.
박 전 대통령은 세 차례의 시도 끝에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1942년 3월 우등생으로 졸업하면서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가 하사하는 금장시계를 은사상(恩賜賞)으로 받았다.
법원 판결이요. 법원 판결도 거르시든가 맘대로 하세요.
08/30 11:01 IMIN: 672327 IP: 49.♡.162.11 MS: 2016
아직 재판중입니다 7월에 강모씨가 이의신청서 제출했구요
08/30 11:09 IMIN: 678564 IP: 110.♡.14.52 MS: 2016
내로남불 이신가요ㅎ 님도 저런자료 들고오셨잖지 않습니까..
08/30 11:14 IMIN: 678564 IP: 110.♡.14.52 MS: 2016
댓댓글 다는게 왜 막아졌죠.
내로남불이 아니라 박정희 친일이 극우 몇 사이트를 제외하곤(그중에서도 반박을 못하니 착한친일, 어쩔 수 없는 친일이라고 떠들긴 하는데)
중론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를 했다 법원 판결을 받는중이죠.
그럼 당연히, 아직까진 박정희는 친일을 했다는 게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거 아닌가요? 차라리 어쩔 수 없는 친일이라고 떠들고 다니셔요.
수많은 애국선열, 독립운동가 욕보이는 짓이겠지만요.
근거도 없는 자료에 괜한 시간 낭비 더 하긴 싫네요. 우선, 이 자료는 관련기관에 제보하도록 하겠습니다.
08/30 11:18 IMIN: 672327 IP: 49.♡.162.11 MS: 2016
‘박정희 혈서 조작’ 글 퍼나른 정미홍 “조종한다는 뜻의 조작”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051657001&code=940100#csidxaab850725dc0c6f88478d11985c079f
본문의 주장을 그대로 하신 정미홍씨도 법원가니 꼬리내리고 말장난 해댑니다.
박정희 친일 행각에 대해서 반박하는건 정말 얼토당토 않는 짓이에요. 이승만 국부라고 떠드는 정신나간 여편네랑 다를 거 하나 없습니다. 고속도로 개통이니 한강의 기적이니 그런 자료들이나 물고 빨고 하시지 왜 굳이 반박당하실 글을 쓰시는지;;;
-----
글쓴이분
http://orbi.kr/bbs/board.php?bo_table=united&wr_id=9010827&sca=&sfl=mb_id%2C1&stx=cf0d4302ee5e023ddd6e
이 글 쓴 분 맞으시죠? 이상한 자료 옮겨다니지 마시고 수능 80일도 안남았습니다.
부모님 힘들게 하지 마시고 공부 하세요. 수능 치고 정말 뭘 하든 널린게 시간일텐데 뭐하러 이 값진 시기에 이런 글이나 쓰고 계신가요.
정신적으로 정 힘드시면 상담받고 약 처방 받으세요.
08/30 11:06 IMIN: 672327 IP: 49.♡.162.11 MS: 2016
대법판결 아니고 저건 1심판결일뿐입니다 그리고 제 건강 걱정해주시는건 감사합니다 이미 대학은 합격한상태이며 수능이아니라 다른시험 준비중이니 걱정안해주셔도 될거같습니다^^
08/30 11:11 IMIN: 678564 IP: 110.♡.14.52 MS: 2016
더덧은 많이달면 안달립니다 저도 안달려서 여기다는거구요 어쩔수없는 친일이라.. 뭐각각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니 그렇게 말씀하실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전 아니라고 보니까요 뭐.. 이제 말해봐야 똑같은 말만되풀이 될거니까 글은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망가냐고 하실수도있겠지만 더 하실말씀있으시면 쪽지로 보내주시면 확인하고 답장하겠습니다
08/30 11:21 IMIN: 678564 IP: 110.♡.14.52 MS: 2016
독재는 저도 비판하는 바입니다 거기에 대해선 할말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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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덧은 많이달면 안달립니다 저도 안달려서 여기다는거구요 어쩔수없는 친일이라.. 뭐각각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니 그렇게 말씀하실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전 아니라고 보니까요 뭐.. 이제 말해봐야 똑같은 말만되풀이 될거니까 글은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망가냐고 하실수도있겠지만 더 하실말씀있으시면 쪽지로 보내주시면 확인하고 답장하겠습니다
자신있게 글 쓰시더니 이런 댓글 하나 남기시고 글 삭제하시면 어떡합니까;;
좋은 글 널리널리 알려 박정희 친일 안했다는 걸 알리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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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계속합시다 말씀해보시죠ㄱㄱ
박정희가 친일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근거를 들어가면서 말씀해주세요.
쓰신 모든 댓글은 저장할거니 신중하게 써주시길 바랍니다.
아마 제가 자료들고 오시면 또 아 그건 님주장이잖아요 빼애액 아직완벽한 판결이 아니잖아요 빼애액 하시면서 님도 완벽한 자료를 들고오시지않으셨죠?
ㅋㅋㅋ
전 법원 판결 및,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인용한 만주신문을 근거로 주장했지않습니까.
아 참, 우선 전 글의 자료 출처를 검색해보니 첫번째(맨윗 상단) 출처로 일베가 뜨더군요.
제가 거긴 워낙 싫어해서;; 다른 건 없나요?
그럼 제가 인용한 사진도 오마이뉴스 기사인데요?
오마이뉴스에서 박정희 친일 반박 기사를 썼다고요? 링크 정도는 덧붙여주시죠.
박정희 친일 반박 주장을 하시라니까 왜 자꾸 다른 소리를 하세요;;
그리고 법원은 지금 정미홍씨의 주장을 판결하는거죠. 빼애액이란 용어는 제가 님한테 써야 맞는거 아닌가요?
이거 보시고 하실말씀은 글지우시고 쪽지로해주세요 이제 다른분들 불편하시니까 나중에 쪽지공개하시던 말던은 알아서하시구요
위 기사는 2009년 기사이고 제가 주장한 법원 판결은 올해 6월이므로 3개월 채 되지 않았네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게 기사의 소제목을 보니 저 내용을 오마이뉴스가 주장한게 아니라 친일진상규명위란 곳에서 저렇게 주장했다는 걸 인용한거고 그 주장이 민족문제연구소와 상반된 견해라고 기사를 썼네요.
기사 안읽어보셨죠?
글이야 뭐,,, 불편하시다면 지우시겠습니다.
쪽지확인 부탁드립니다^^
에휴
항상보면 박정희찬양하는사람들 말은 다 그럴듯한데 까들한테 팩폭당하고 사라지는거같음
이정희가 하던말이랑 똑같네 아주. 추미애 민주당 대표도 당선되자마자 박정희 묘소가서 참배하셧는데 아주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여야 할거없이 친일파나봐요?? 그쪽이 좋아하시는 통진당빼고 ㅋㅋ
=== 사실인 내용 ===
||http://img.tf.co.kr/article/home/2012/08/30/120830_503f17273a7a8.jpg?height=540&width=320||||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6/Manju_newpaper_19390331.jpg?height=540&width=320|||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7/Park_Chung-hee%2C_Manchu_Shinmun.jpg||||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7/Park_Japan.JPG||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일본|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다가, 한국인 교사 차별 문제로 일본인 교장과 갈등을 빚었다. 이 사건은 박 대통령이 일본군 육군 장교가 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 문경 교사 시절 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 그 동네 순사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심지어 조선어 시간에 몰래 태극기나 한국의 역사를 가르쳐 주었다는 증언도 있는데, 아마도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가인 셋째 형 [[박상희]]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그러다가 결국 교내 관련 인사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홧김에 [[만주군]]에 지원했다고 것이다.[[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61&yy=2014%5D%5D%5D" target="_blank">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3696]][[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61&yy=2014]]] 당시 일제는 [[군국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장교만 되어도 지역 유지에 맞먹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심한가 하면 군수가 하급 장교에게 싸대기를 맞아도 아무 소리를 못할 정도였다. 일본군의 흑역사 중 하나인 [[오사카 고스톱 사건]]이 논란이 된 것도 당시 일본군 입장에서는 '감히 [[짭새]]가 황군에게 깝치다니!'란 입장이었다.]
박정희는 구미역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가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지원하였다. 당시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었다. 하지만 나이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자, 재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군에 입대하고자 했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기사에 박 대통령의 혈서와 편지 내용이 실려 있으며, 현재 [[https://ndlopac.ndl.go.jp/F?func=find-c&ccl_term=001+%3D+000000105606&adjacent=N&x=0&y=0&con_lng=jpn]]하고 있다. 이때 박정희와 같이 교사 생활을 한 유증선은 나중에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517&C_CC=AC
���신이 박정희에게 혈서를 쓰도록 권유했으며, 그 말을 들은 박정희가 즉시 시험지에다가 핏방울로 혈서를 썼다]]고 증언하였다. 의 저자 이정식 경희대 석좌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혈서에 대해 [[http://news.joins.com/article/7785547
"1939년과 1940년 당시 일본군이나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대에 장교로 임관하기 위한 혈서 제출은 일종의 유행이었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피나는 노력으로 1940년 4월 1일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고 우수한 능력을 발휘하여 주목받았다. 박정희의 제자 이순희의 증언[*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에 따르면, 재학 시절에 문경에 돌아와서 자신을 괴롭힌 지역 유지들을 협박하여 원한을 풀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 군사정변]]에 가담한 군인이 없었으나, 간도와 용정의 광명중학교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는 군인들이 나오는 등 이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http://img.hani.co.kr/section-kisa/2005/02/02/005000000120050202R02210169_0.jpg
||2005년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병적기록||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우등 졸업 기념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99240
���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그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하고 1944년 300명의 동기생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수습 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에 주둔한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23일 정식 소위로 임관하면서 [[8.15 광복]]까지 만주국 육군 제8단에서 10개월 동안 [[만주국]] 장교로 근무하였다. 만주국군에서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정변]]의 주축으로 활동한다.
박정희가 소속된 제8단의 주 토벌 대상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는데, 당시에는 [[좌파]] 계열의 [[독립군]]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독립군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설령 박정희가 독립군을 사살하지 않았더라도, 독립군과 협력한 [[중국군]]을 공격하며 항일운동을 방해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명자는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66-67쪽에서 1972년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창생들에게 "박정희는 온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란 말을 들었다고 적었다. 한편 박정희와 같이 제8단에서 복무한 신현준, 방원철 등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47&aid=0000049417&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나 박정희는 복무 당시 팔로군 토벌 기회가 전혀 없었으며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하여 사실관계에 논란이 있다. 실제로 1944년 경에 조선독립군과 팔로군이 만주지역에서 거의 활동하지 않았는데, 1940년대 초 [[간도특설대]] 등 일본군 특무기관에 의해 항일단체들이 만주에서 토벌당했고 그 결과 팔로군과 공산당 연계 독립군은 화북 지방에서 게릴라전을 하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소속 부대가 없어지자, 동료들과 함께 [[한국광복군]]에 들어가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당시 광복군은 세 불리기에 혈안이 돼 있어 만주군 출신 한국인들을 대거 받아주었기 떄문이다. 국가기록원은 친일파 청산 작업이 한창이던 참여정부 시절에 박 전 대통령의 병적 기록을 공개하였는데, [[http://monthly.chosun.com/client/coreporter_20130722/print.asp?idx=1926&cPage=46&wid=nkymm
조���일보]]는 박정희 대통령이 표면상으로는 독립국인 [[만주국]]에 소속돼 있으므로 조사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박정희는 [[창씨개명]]을 했기 때문에 '다카키 마사오'로 적혀 있으며, 박정희의 큰형인 박동희의 서명이 적혀 있어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021839168.html
일제가 군인과 군속 가족에게 나눠준 문서 양식에 박동희가 내용을 직접 적어 1945년 3월 경북 구미 면사무소에 제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박 대통령의 친일행적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모두 인정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행적을 입증하는 만주신문의 사본을 공개하였으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5&aid=0000385462&
]][[http://www.ytn.co.kr/_ln/0103_200911051645599201
]], 몇 년 뒤에는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여 [[친일인명사전]]에 기재하였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2002
]] 박정희 대통령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에서도 [[[http://www.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pa01&wr_id=38
��� 시절 박 대통령의 친일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에서도 박정희의 이력을 소개하면서 [[http://www.presidentparkchunghee.org/parkchunghee/profile.php
1940��� 4월 ~ 1942년 4월까지의 친일행적]]을 다루고 있다. [[조갑제닷컴]]에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이루어진 일본 방문에서 박 대통령이 신경군관학교 교장인 나구모 신이치로 육군 중장을 만나 [[http://www.chogabje.com/premium/book/view.asp?sCidx=347
"선생님의 지도와 추천 덕분에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대통령이 되었습니다)"]]고 인사한 내용이 적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이케다 하야토 총리를 비롯한 일본 고위 정객들도 만났는데, 총리관저에서 열린 만찬 자리에서 깍듯이 머리를 숙이고 “[[http://news.donga.com/3/all/20130422/54604083/1
���배님들, 우릴 좀 도와주십시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릴 키워 주시오. 그리고 청구권 같은 문제 신경 쓰지 마시오. 그까짓 것 없어도 그만이오]]"라고 말해 비굴한 태도란 비난을 받았다. 1962년에는 자민당 부총재와 중의원 의장을 지낸 인물이자 [[대동아공영권]] 부활을 부르짖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22809.html
���노 반보쿠]]가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와 두 차례 회담을 가졌는데, 도쿄를 떠나면서 기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과는 (피차에) 부자지간을 자인할 만큼 친한 사이”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것은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기쁘다”고 말해 [[김영삼]]과 [[김대중]]의 비판을 받았다.
반면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54890
���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아]] 논란이 되었는데, 성대경 위원장은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8193
'민족문���연구소가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 혈서를 작성했다는 만주신문 기사도 사전 발간 직전에 알게 돼 다시 거론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하였다.
자민당 출신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지사는 친일파 [[김완섭]]과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23725
���담]]에서 후쿠다 전 수상 방한 당시 박정희가 일본의 조선통치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증언하였으며, "자신은 대단히 가난한 농촌의 자녀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는데 일본인이 와 의무교육을 받지 않으면 부모가 처벌받는다고 명령해 학교에 가게 됐다. 그리고 성적이 좋자 일본인 선생이 사범학교에 가라고 권했고, 그후 군관학교를 거쳐 도쿄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일본의 교육은 대단히 공평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박정희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https://pbs.twimg.com/media/CTF8VkUUkAAfqZJ.jpg
2014년 이시하라는 재차 이 내용을 발언했고, 결국 한국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 [[http://www.nocutnews.co.kr/news/576865
기���]]로까지 나왔다. 이 증언은 이시하라 본인이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일했으며 한일외교에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었으며, 1979년에 후쿠다 내각 자격으로 방한하는 등 박정희와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는 만큼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0092100209205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0-09-21&officeId=00020&pageNo=5&printNo=15062&publishType=00020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06130020920102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06-13&officeId=00020&pageNo=1&printNo=17748&publishType=00020]] 신빙성이 높다.
현재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자 일본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와도 매우 깊은 친분이 있었다. 기시 노부스케를 필두로 한 일본 전범세력은 박정희의 군사정변과 정권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박정희가 두 번째 유신 대통령에 오른 1978년 12월에도 유일하게 비공식 축하 사절로 외국에서 왔다. 그래서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A급 전범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노부스케와 친서까지 교환할 정도로 친했는데[* 무려 수교훈장 중에서 1등급인 광화대장을 받았다.], 2013년 10월 이 사실이 드러나 커다란 논란이 됐지만, 박근혜 정부는 과거 정부에서 적법하게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서훈을 취소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번에 KBS에서 방영하기로 한 내용에서 관련 부분이 삭제돼서 외압이 아니냐는 의혹을 샀다.[[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37710]] 기시 노부스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박정희가 "우리 젊은 육군 군인들이 군사혁명에 나선 것은 구국의 일념에 불탔기 때문인데, 그때 일본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다"며 기술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재일교포 학자인 강상중 교수와 현무암 두 사람이 같이 저술한 를 보면 된다.
여담이지만 [[만주군]] 장교 선배인 [[신현준(군인)|신현준]]의 회고에 의하면, 1946년 5월 10일 박정희는 해방된 조국의 모습에 실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조선 사람은 풀어놓으면 모두가 지 잘났다는 것뿐이고, 지멋대로 아닙니까? [[한국인은 패야 말을 잘 듣는다|조센징과 명태는 두들겨패야 한다]]는 소리를 들을때마다 왜놈들을 패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꼬라지를 보니 그런 비아냥을 들어도 싸다 싶습니다. 누군가 매를 들고 두들겨 주기 전에는 이런 무질서는 백년하청일 겁니다."[*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일제의 식민사관 교육으로 인한 관점일 수도 있지만 고려해야 할 점은 당시 사회 분위기가 각종 이념으로 인해 많이 혼란스러운 상황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광복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않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던 박정희가 과연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일제시대때 독립운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이병주, 황용주 와의 술자리에서 독립운동 때문에 우리나라가 독립된 것이 아니라며 일제시대때 독립운동을 말짱 엉터리로 치부하였다. 또한 해방이후 일어난 정치적 혼란을 독립운동가들의 탓으로 돌리며 독립운동가들을 나라망신시킨 자들이라며 비난하였고 일본군인이 천왕절대주의자가 되는 게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도 하였다고 한다.[[http://www.chogabje.com/premium/book/view.asp?sCidx=225]]
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3/0316/IE001558320_STD.jpg
||1961년 11월11일 일본 총리 관저 만찬회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담소하는 박정희(가운데). 왼쪽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경우 이 같은 내용에 더해 술만 마시면 곧잘 일본 군가를 즐겨 불렀다는 점을 들어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했다. 특히, 1990년 출판된 육영재단 인터뷰 기록에서 딸 박근혜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후쿠다 전 수상과 깊은 친분을 과시했다고 밝혔다. 이는 [[http://contents.archives.go.kr/next/archive/popArchiveEventList.do?archiveId=0000577507
국���기록원]]에서도 확인 가능한 부분이다. 즉, 동아시아에서의 침략 행위를 벌인 [[전범]]들인 일본 [[극우]] 정치인들과 친밀했던 점, 그 발언에서 일본 군부와 만주국 체제가 자주 나오는 점을 감안하면 박정희 본인이 친일 성향을 가졌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박정희의 차녀인 '''[[박근령]]'''의 경우 [[천황]] 폐하 등의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을 봐도 그렇다.
즉,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한 친일파는 아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행적은 사실로 입증됐기 때문에 친일파가 맞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을 [[을사오적]]이나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윤치호]] 등의 악질 친일파와 동등하게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직접적으로 항일투사나 독립운동가와 그 일가를 핍박한 기록이나 증언은 없으며, 이는 같은 대구사범학교 출신인 [[신상묵]]과 대조적이다. 거기다 박정희는 셋쩨 형인 [[박상희]] 덕분에 개인적으로 독립운동가에 대해 정보망이 넓은 편이었다. [[박상희]]는 [[신간회]]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친형의 동료를 밀고해 얼마든지 공훈을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일제 패망 뒤 광복군 입대, 귀국 이후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였던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노동당]]에 참여한 행적을 보면 박정희의 친일은 적당히 출세를 하려는 의도해서 한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 처단 기준에 들어가지 않는 수준이었다. 한국 [[군부]]에는 [[백선엽]]과 같이 만주군 출신 인물이 많았기 때문에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한편 이런 친일 행적이란 요소 때문에 비밀 독립군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박정희가 광복군이 된 것은 사실이나 문제는 그것이 '''[[8.15 광복]] 이후'''라는 것이다. 해방 직후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은 '해방 조국의 군대'를 만들고자 했다. 기존의 3개 지대로 구성된 [[대한 광복군]]의 인원만으로는 부족해서 7개의 잠편지대를 확충하고, 이 잠편지대에 구 일본군 출신의 인재 또한 받아들이려 했다. 이 때 박정희가 광복군에 가담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의 상관이 김학규 장군이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에 박해를 받아 병고를 치르고 있던 김학규를 보살피고 건국독립장도 수여했다.] 이 낭설이 처음 퍼지게 된 것은 1967년 박영만이란 사람이 대한광복군의 활동을 소재로 한 '광복군'이라는 '''소설'''을 쓰면서부터다. 박영만은 박정희 등 일부 군인들이 광복군과 접촉해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0730364&
���시 대한 광복군 측에서 일본군 내 조선인 군인들에게 '겉으로는 친일하되 내부에서 일본군의 활동을 방해하라'는 선전문을 살포]]한 적은 있다.] 몰래 비밀 독립운동을 했다는 내용을 창작해 소설에 적었다. 물론 사실이 아니며 박정희 본인도 책을 읽은 뒤 [[http://www.segye.com/content/html/2006/08/09/20060809000641.html
���실이 아닌 내용을 왜 썼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
새누리당에서도 박정희가 비밀 독립군이라는 주장이 나왔다.[[http://www.hankookilbo.com/v/0690c6146e934d0b8dcd618daa22c14f
]] 박정희가 백강 조경한 선생을 도왔다는 주장인데, 정작 조경한 선생의 외손자이자 독립운동 연구가인 심정섭씨는 이러한 주장은 거짓이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4216.html
���정희 본인은 친일파란 부끄러운 이력을 감추거나 조작하려 들지는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 논란이 있는 내용 ===
1970년 내한했을 때 동아일보에서 진행한 이시하라 신타로와의 인터뷰에서, 이시하라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例えば韓国の日本の統治の問題。あれは合法的にやって、しかも世界が是として、べつに外国から文句が出たものでもない。しかも韓国、朝鮮人が自分たちで選んだ道なんだ。
その判断を、ある意味で冷静に評価したのは韓国の大統領だった朴正煕さんだ。私も何度かお目にかかった。あるとき、向こうの閣僚とお酒を飲んでいて、みんな日本語がうまい連中で、日本への不満もあるからいろいろ言い出した。朴さんは雰囲気が険悪になりかけたころ「まあまあ」と座を制して、「しかしあのとき、われわれは自分たちで選択したんだ。日本が侵略したんじゃない。私たちの先祖が選択した。もし清国を選んでいたら、清はすぐ滅びて、もっと大きな混乱が朝鮮半島に起こったろう。もしロシアを選んでいたら、ロシアはそのあと倒れて半島全体が共産主義国家になっていた。そしたら北も南も完全に共産化された半島になっていた。日本を選んだということは、ベストとはいわないけど、仕方なしに選ばざるを得なかったならば、セコンド・ベストとして私は評価もしている」(拍手)。
いや、こんなところで拍手しなくていい。
朴さんが、「石原さん、大事なのは教育だ。このことに限ってみても、日本人は非常に冷静に、本国でやってるのと同じ教育をこの朝鮮でもやった。これは多とすべきだ。私がそのいい例ですよ」と言う。
「私は貧農の息子で、学校に行きたいなと思っても行けなかった。日本人がやってきて義務教育の制度を敷いて子供を学校に送らない親は処罰するといった。日本人にしかられるからというんで学校に行けた。その後、師範学校、軍官学校に進み、そこの日本人教官が、お前よくできるな。日本の市谷の士官学校に推薦するから行けといって入学。首席で卒業し、言葉も完璧でなかったかもしれないが、生徒を代表して答辞を読んだ。私はこのことを非常に多とする。相対的に白人がやった植民地支配に比べて日本は教育ひとつとってみても、かなり公平な、水準の高い政策をやったと思う」
...예를 들면 일본이 한국을 통치한 문제. 그것은 합법적이고 게다가 세계도 인정하고 외국이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한국인,북한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겁니다.
그 판단을 냉정하게 평가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나도 몇번인가 만나뵙습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의 각료들과 술을 마셨는데 모두들 일본어를 잘했고 일본에 대해 여러 불만도 있어서 여러가지 말을 꺼냈습니다. 박 대통령은 분위기가 험악해질 즈음에 "자자..."라고 말하며 진정시키고 난 뒤 이리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우리 민족은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일본이 침략한 게 아닙니다. 우리 선조들이 선택한 겁니다.''' 만약 청나라를 선택했다면 청은 바로 멸망해서 더 큰 혼란이 한반도에 일어났겠죠. 만약 러시아를 선택했다면 러시아는 바로 쓰러져 반도 전체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 겁니다. 그렇게 됐다면 북도 남도 완전히 공산화가 되었겠지요. 일본을 선택한건 최고라고는 말안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했다면 두 번째로 최고라고 나는 평가합니다."
아니, 여기서 박수칠 게 아닙니다.
박 대통령은 "이시하라 씨, 중요한 건 교육입니다. 여기에 한해서 일본인은 매우 냉정하고 우리나라가 행하고 있는 똑같은 교육을 조선에서도 행했습니다. 이건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내가 좋은 例(예)지'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서 학교에 가고싶어도 갈 수 없었습니다. 일본인이 행한 의무교육제도에 따라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부모는 처벌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인에게 혼난다고 하니까 학교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사범학교, 군관학교에 갔고 그곳의 일본인 교관이 "넌 기특하구나"라고 말한뒤 일본 시부야 사관학교에 추천해준다고 해서 그곳으로 입학, 수석으로 졸업했고 말은 완벽하지 않았을지도 몰라도 학생을 대표해서 답사를 읽었습니다. 이 점에서 나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백인이 행한 식민지 지배에 비해 일본은 교육하나에도 꽤나 공평하고 수준 높은 정책을 행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이 인터뷰는 미심쩍은 점이 있는데 일제는 한국 강점기 동안 의무교육을 실시하지 않았을 뿐더러 시부야 사관학교는 일본 본토에 있었단 점이다. 박정희 본인의 기억이 잘못됐거나 혹은 이시하라 신타로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 둘 중 하나이지만 아직까지도 진위여부는 불명.
해방되고 대통령 된 후에도 일본 군복을 입고 코스프레를 했다는 말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이 1991년 12월 24일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 집무실에서 일본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걸 목격했다는 증언을 말하는 것이다.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을 타고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강창성의 이 같은 증언은 아직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박정희를 비판하는 데 이용되고 있지만, 반대로 이 주장에 대해 공적인 출처를 통한 반박 또한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개인블로그 등 일부에선 강창성이 박정희가 승마복을 입은 것을 일본군복을 입은 것으로 착각한 것이라 주장한다. 당시 일본군이나 만주군에서 점퍼 스타일의 옷을 착용한 건 항공대의 파일럿들 뿐이고, 기병 제복에는 점퍼가 없으며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병과는 보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를 회상하는 코스프레를 즐겼다는 사람이 점퍼 입고 기병 장교 코스프레를 한다? 차라리 망토를 걸치고 칼을 차고 있더라고 했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발언은 하나회 적발 사건 이후 군사정권과 정치적으로 등진 강창성이 비난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내뱉은 발언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승마복이라고 해서 승마 경기에서 입는 그런 것만 생각하면 안 되고, 점퍼 스타일의 승마복도 존재하기는 하며, 사실 "추억을 되살린다"는 목적에 맞추려면 일본군복이 아니라 '''만주군복'''을 입는 게 맞다.
하지만 강창성의 발언을 자세히 살펴보면 강청성은 박정희가 기병 코스프레를 했다고 하지 않고 "만주군 장교로 말을 타던 추억을 떠올렸다"고 했다. 강창성은 박정희가 기병이란 얘기는 하지도 않았고, 만주군 장교로서 말을 타던 시절을 언급한건데, 이것을 확대해석하여 '강창성은 박정희가 기병코스프레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기병복장은 이러이러했으니 강창성의 발언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청년기에 일제시대를 경험하고, 해방직후에 육사에서 군사관련지식을 습득한 강창성이 일본군복과 승마복을 헷갈렸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강창성은 분명히 박정희가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든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음을 유념하자.
아무튼 논란이 되는 문제이니만큼 강창성의 발언에 대한 진위여부는 읽는 사람의 판단에 맡긴다. 다만 최대한 양측 입장을 절충해서 해석해 보자면 박정희가 일본군복을 그대로 입은 것은 아니고 '''일본군복을 떠올리게 하는 [[밀리터리 룩]]'''을 입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실이 아닌 내용 ===
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2/1206/IE001525015_STD.jpg
{{|2005년에 출간된 (2판)에는 박정희의 일본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나와 있다.|}}
2005년 출간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에 박정희 일본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개제되면서 '''박정희가 창씨개명을 두 번이나 했으니 악질 친일파가 아니냐?'''는 논란이 생겨났다. [[조희연(교육감)|조희연]] 교수도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였으며,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고 말해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 설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오마이뉴스]]와 [[한겨레]]는 기사를 내고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다카기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되었으며 자료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고 밝히면서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070413%5D%5D" target="_blank">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10625]][[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070413]]
https://pbs.twimg.com/media/BqekdZWCAAA3HSK.jpg
이 사진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복무 시절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으나 1941년경 동부 뉴기니 전선의 일본 육군대위 사진을 합성한 것으로 사실과 다르다. 박정희가 엔카를 즐겨 들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심수봉]]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엔카를 부르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169785.html
���디서 왜년을 데리고 왔느냐]]고 화냈다고 한다.
언론인 문명자는 박정희의 독립군 토벌설을 제기하였는데, 한홍구 [[성공회대]]교수는 당시 만주에 활동한 독립군 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굳이 따지면 당시 팔로군이라는 공산군에 일부 독립군이 합류하기도 했었는데, 당시 박정희가 속한 부대는 팔로군과 교전한 적이 없다. 류연산 작가는 박정희가 [[간도특설대]] 소속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역시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3&aid=0000007161]]
사실이 아닌 내용도 복붙해 오셨네